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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남양주 사릉



10, 2017

남양주 사릉

단종의 비 정순왕후 릉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7,2015
창덕궁 정전, 인정전(仁政殿)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외국인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죽은 건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의 전각들도 마찬가지다. 후손들이 살지 않는 고택들도 마찬가지다. 사람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화석화된 느낌.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조선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해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렀다. 조일전쟁(1592~1598년)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고 이후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인정전이 재건되고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할때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진선문


2015년 7월 24일 금요일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낙선재 궁스테이 반대한다.

7,2015
낙선재, 창덕궁


최근 논란이 되는 궁스테이는 다시한번 말하지만 절대 반대다. 문화재는 원형대로 보존하고 후대의 사람들도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낙선재를 숙소로 사용하려면 전기시설을 설치하는 등 대수선을 해야한다고 한다. 목조건물인 낙선재에  혹시 불이라도 난다면 일순간 다 타버린다. 이미 우리는 숭례문이 불타는걸 지켜봐야 했다.

문화재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소수를 위한 궁스테이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다른 형태로 얼마든지 우리 문화재를 알릴 기회가 있다고 본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단청을 안한 사대부주택 형태이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맹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樂善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고 했다. 임금이 이 곳에서 인의와 충신을 지키며 선을 즐겨 하늘의 작록(爵祿) 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낙선재’ 현판은 청나라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 의 글씨이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6,2014
전승문(북문),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지난 달 22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기도 성남, 광주, 하남시에 걸쳐 위치한 남한산성은 맑은 날에는 서울 남산이 보이는 곳으로 군사적 요충이다.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온조 대왕 13년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 와서 임진란(1592년) 이후 산성 수축 계획이 있었으며 인조반정(1623년) 이후 본격화 되었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인조는 도성인 한양으로 버리고 이곳으로 와 45일을 버티다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만다. 남한산성은 1907년 탄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 1999년 부터 발굴,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홍보 자료를 보면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등재 기준 (ⅱ), (ⅳ)에 충족되어 ▲ 병자호란 등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 ▲ 조선의 자주·독립의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 ▲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 등이 세계유산적 가치로 인정받았다.

또한 ▲ ‘완전성’ 측면에서 효과적인 법적 보호체계와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라는 단일 민간 전문기 관를 통해 보존 관리되고 있다는 점 ▲ ‘진정성’ 측면에서 성곽과 산성 도시는 충분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구성 요소로 하고 있고 다양한 사료에 의해 진정성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평가를 받은 점이 결정적인 등재 요인으로 꼽혔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남한산성에는 여러 유적이 있지만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남한산성 성곽

수어장대

수어장대

침괘정

우익문(서문)
한남루(행궁 정문)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II

하회마을

7,2010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일가의 솟을대문

 

대문의 한자는 애한정, 수명진으로 한적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하고, 밝고 진실된 것을 지킨다의 의미.

 

 

하회마을 골목에서

북촌댁(화경당)에서

 

싱그러운 하회마을 여름 풍경

 

너무 늦은 시간 방문하여 마을을 제대로 돌아 보질 못했다. 병산서원도 못보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창덕궁 희우정에서

8,2010

창덕궁에서

 

농경사회인 조선왕조에서 비는 매우 중요하다. 기우제와 관련된 전각인 희우정은 주합루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다.

 

주합루 서남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원래 인조 23년에 초당으로 세워 취향정이라 했으나 숙종 16년(1690)에 가뭄에 기우(祈雨)하여 비가 내리니 희우정이라 이름을 바꾸고 초당이던 정자를 기와로 바꾸었다 한다.

 

태풍 지나간 후 연일 비가 내린다. 기우제를 지냈나..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하회마을

7,2010

하회마을

 

8월초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하회마을은 남산 한옥마을과 달리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지난 주말 부용대에서는 부용지애라는 수상 뮤지컬이 열렸다고 한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세계문화유산 의릉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다

의릉

6,2010

의릉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릉 가운데 많이 알려진 곳은 태강릉, 선정릉, 정릉 등이다. 지난해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선정 사유는 이 유산이 잘 관리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유형의 요소와 더불어 약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이 전승되어 온다는 무형적 요소가 융합된 뛰어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은 그리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다. 쉽게 찾아가려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찾으면 된다. 의릉을 사이에 두고 왼편은 미술원이 오른편은 연극원과 영상원이 위치해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다음부터 왕릉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일반 시민들은 출입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1972년경에는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 시설물들을 설치하였는데, 박정희가 자주 들러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6,2010

의릉에 남아 있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


의릉은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조선조 20대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MBC 드라마 "동이"에 나오는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세살이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건으로 사사된다. 이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며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세자 대리청정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1720년 6월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 하였으나 재위 4년간 당쟁으로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후 1724년 8월 20일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복통과 설사를 거듭하다 8월25일 사망하자 우여곡절끝에 연잉군은 영조로 등극하게 된다. 경종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이 독살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이후 영조가 경종의 독살설의 배후라는 의심의 굴레를 평생 지고가게 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부터 6년 뒤 1730년(영조 6) 6월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해 10월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참조: 문화재청 의릉관리소


의릉의 뒷산인 천장산 정상까지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역사 공부도 하고 가족 나들이로도 좋을 듯 싶다.


살아있을 때 제대로 왕노릇도 못한 경종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 것 같다. 이젠 편히 쉴 수 있으려나..

2009년 5월 7일 목요일

해질무렵

9,2007
Canon Ixus, Shrizo, Okinawa




세계문화유산 오키나와 슈리성에서..
 

2008년 11월 4일 화요일

오키나와 슈리성 정전에서

9,2007
Canon ixus,Okinawa



류큐왕국(琉球:오키나와의 옛왕국명)의 슈리성의 정전
2000년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