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5일 목요일
자연과 인공의 조화, 세계문화유산 동구릉
건원릉/동구릉
왕릉은 기본적으로 죽은 자의 공간이지만 산자와도 만나는 공간이다. 조선의 왕릉은 자연과 인공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했다.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능역 자체가 자연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따른, 능역의 자연 친화적인 조영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한다.
지난 9월 중순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을 다녀왔다.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과 후대 왕릉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왕릉이 하나 둘 조성되면서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66(철종 5년) 익종의 수릉이 옮겨진 후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 전체를 대충이라도 모두 보려면 반나절 이상 소요될 듯 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건원릉, 목릉, 원릉을 주로 살펴 봤다.
먼저 태조의 건원릉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아직 푸른 수풀과 잔디에서 지난 여름의 푸르름이 남아있다.기본적으로 조선은 고려의 능제를 따르고 있으며 특히 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 공주의 현정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건원릉은 조선왕조 릉제의 표본이다. 또한 중국의 황제릉(명대의 황제릉)을 참고하여 조성했다.
조선의 왕릉이 고려와 다른 점은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른 것 등을 들 수 있다. 건원릉은 단릉 형태이고 다른 릉의 봉분과는 달리 함흥억새가 자라고 있다. 다른 곳의 억새는 살지 못한다고 하며 1년에 한번 벌초한다고 한다.
건원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동구릉관리소 건원릉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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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출처: 문화재청 |
건원릉 오른쪽 뒤로 조금 걸어가면 14대 국왕인 선조의 목릉(穆陵)이 나온다. 동구릉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꺽어진 참도와 비각만 보이고 능침은 보이지 않는다.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과 노비들의 숙소인 수복방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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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의 홍살문과 참도 |
선조의 목릉은 조선왕릉 제도에서 몇 가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세조 이래 왕릉에 병풍석이 사라졌는데 다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왜란으로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목릉에는 병풍석이 단단히 둘러쳐 있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왕위승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방계 혈통에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선조대에는 정치적으로 동서분당, 정여립 사건 등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외침으로 이후 조선의 역사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목릉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동구릉관리소 목릉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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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14대 선조의 릉) |
혼유석 앞에 놓여진 장명등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다. 잡귀가 불을 무서워 하기 때문이며 왕릉에 반드시 설치한다. 사실 장명등은 사찰의 석등 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인 조선의 능제는 유교의 예와 제도를 따랐지만 내세관은 불교였다. 삼성동의 선정릉 인근에 봉은사가 있고 광릉에는 봉선사 그리고 여주 영릉에는 신륵사가 능침 사찰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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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의 장명등과 혼유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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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왕후 릉 |
망주석은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의 좌우에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망자의 혼이 밖으로 놀러 갔다가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과, 음양의 조화, 능의 위치표시, 왕릉의 생기보존 등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망주석에는 조선 초기에는 중간에 귀모양의 돌출부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나중에는 세호(細虎, 작은 호랑이)라고 하는, 모습이 도롱뇽이나 다람쥐를 닮은 형상의 작은 동물을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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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왕후릉의 망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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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의 문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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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의 무인석 |
선조 릉에서 내려다 보면 아래 정자각과 비각이 보인다. 정자각의 기와는 최근 새로 이었는지 새것이다. 아래 왼쪽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릉이 살짝 보인다. 선조의 정비와 계비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정비에서는 후사가 없었고 인목왕후에게는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사사되고 만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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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과 비각 |
목릉의 원래 위치는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 위치한 인평대군묘 자리였다. 왕릉 조성후 능참봉 출신의 박자우가 그 자리가 흉지라는 상소를 올린다. 선조는 결정을 못내리고 다른 곳을 찾다가 시간에 쫓겨 결국 태조의 건원릉 옆으로 정하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 묘를 쓴 인평대군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평대군의 6대손이 남연군이다. 남연군의 아들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 이들 모두 조선 후기 왕과 최고권력자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래 목릉이 아주 좋은 자리였다는 것이다.
목릉에서 나와 건원릉 앞을 지나 왼쪽 두번째 줄기에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과 이어 21대 영조의 원릉이 나타난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구릉 원릉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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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릉(21대 국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릉) |
조선왕릉 조성에 동원된 기간은 대략 3~5개월, 인원은 5,000명 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국가 공사였다. 예를 들면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 조성 과정에서 석장 40명이 열흘간 혼유석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동구릉 입구의 재실(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하는 곳) 앞에는 관람객들이 투호 놀이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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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릉 입구의 재실 앞에 마련된 투호 |
조선 왕릉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살펴 보세요.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세계문화유산 의릉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다
의릉
6,2010
의릉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릉 가운데 많이 알려진 곳은 태강릉, 선정릉, 정릉 등이다. 지난해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선정 사유는 이 유산이 잘 관리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유형의 요소와 더불어 약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이 전승되어 온다는 무형적 요소가 융합된 뛰어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은 그리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다. 쉽게 찾아가려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찾으면 된다. 의릉을 사이에 두고 왼편은 미술원이 오른편은 연극원과 영상원이 위치해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다음부터 왕릉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일반 시민들은 출입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1972년경에는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 시설물들을 설치하였는데, 박정희가 자주 들러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6,2010
의릉에 남아 있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
의릉은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조선조 20대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MBC 드라마 "동이"에 나오는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세살이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건으로 사사된다. 이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며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세자 대리청정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1720년 6월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 하였으나 재위 4년간 당쟁으로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후 1724년 8월 20일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복통과 설사를 거듭하다 8월25일 사망하자 우여곡절끝에 연잉군은 영조로 등극하게 된다. 경종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이 독살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이후 영조가 경종의 독살설의 배후라는 의심의 굴레를 평생 지고가게 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부터 6년 뒤 1730년(영조 6) 6월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해 10월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참조: 문화재청 의릉관리소
의릉의 뒷산인 천장산 정상까지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역사 공부도 하고 가족 나들이로도 좋을 듯 싶다.
살아있을 때 제대로 왕노릇도 못한 경종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 것 같다. 이젠 편히 쉴 수 있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