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동구릉
왕릉은 기본적으로 죽은 자의 공간이지만 산자와도 만나는 공간이다. 조선의 왕릉은 자연과 인공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했다.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능역 자체가 자연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따른, 능역의 자연 친화적인 조영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한다.
지난 9월 중순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을 다녀왔다.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과 후대 왕릉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왕릉이 하나 둘 조성되면서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66(철종 5년) 익종의 수릉이 옮겨진 후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 전체를 대충이라도 모두 보려면 반나절 이상 소요될 듯 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건원릉, 목릉, 원릉을 주로 살펴 봤다.
먼저 태조의 건원릉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아직 푸른 수풀과 잔디에서 지난 여름의 푸르름이 남아있다.기본적으로 조선은 고려의 능제를 따르고 있으며 특히 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 공주의 현정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건원릉은 조선왕조 릉제의 표본이다. 또한 중국의 황제릉(명대의 황제릉)을 참고하여 조성했다.
조선의 왕릉이 고려와 다른 점은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른 것 등을 들 수 있다. 건원릉은 단릉 형태이고 다른 릉의 봉분과는 달리 함흥억새가 자라고 있다. 다른 곳의 억새는 살지 못한다고 하며 1년에 한번 벌초한다고 한다.
건원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동구릉관리소 건원릉을 참고하세요.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출처: 문화재청 |
건원릉 오른쪽 뒤로 조금 걸어가면 14대 국왕인 선조의 목릉(穆陵)이 나온다. 동구릉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꺽어진 참도와 비각만 보이고 능침은 보이지 않는다.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과 노비들의 숙소인 수복방도 보이지 않는다.
목릉의 홍살문과 참도 |
선조의 목릉은 조선왕릉 제도에서 몇 가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세조 이래 왕릉에 병풍석이 사라졌는데 다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왜란으로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목릉에는 병풍석이 단단히 둘러쳐 있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왕위승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방계 혈통에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선조대에는 정치적으로 동서분당, 정여립 사건 등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외침으로 이후 조선의 역사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목릉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동구릉관리소 목릉을 참조하세요.
목릉(14대 선조의 릉) |
혼유석 앞에 놓여진 장명등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다. 잡귀가 불을 무서워 하기 때문이며 왕릉에 반드시 설치한다. 사실 장명등은 사찰의 석등 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인 조선의 능제는 유교의 예와 제도를 따랐지만 내세관은 불교였다. 삼성동의 선정릉 인근에 봉은사가 있고 광릉에는 봉선사 그리고 여주 영릉에는 신륵사가 능침 사찰 역할을 담당했다.
목릉의 장명등과 혼유석 |
의인왕후 릉 |
망주석은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의 좌우에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망자의 혼이 밖으로 놀러 갔다가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과, 음양의 조화, 능의 위치표시, 왕릉의 생기보존 등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망주석에는 조선 초기에는 중간에 귀모양의 돌출부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나중에는 세호(細虎, 작은 호랑이)라고 하는, 모습이 도롱뇽이나 다람쥐를 닮은 형상의 작은 동물을 조각하였다.
의인왕후릉의 망주석 |
목릉의 문인석 |
목릉의 무인석 |
선조 릉에서 내려다 보면 아래 정자각과 비각이 보인다. 정자각의 기와는 최근 새로 이었는지 새것이다. 아래 왼쪽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릉이 살짝 보인다. 선조의 정비와 계비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정비에서는 후사가 없었고 인목왕후에게는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사사되고 만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다.
목릉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과 비각 |
목릉의 원래 위치는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 위치한 인평대군묘 자리였다. 왕릉 조성후 능참봉 출신의 박자우가 그 자리가 흉지라는 상소를 올린다. 선조는 결정을 못내리고 다른 곳을 찾다가 시간에 쫓겨 결국 태조의 건원릉 옆으로 정하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 묘를 쓴 인평대군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평대군의 6대손이 남연군이다. 남연군의 아들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 이들 모두 조선 후기 왕과 최고권력자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래 목릉이 아주 좋은 자리였다는 것이다.
목릉에서 나와 건원릉 앞을 지나 왼쪽 두번째 줄기에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과 이어 21대 영조의 원릉이 나타난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구릉 원릉을 참고하세요.
원릉(21대 국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릉) |
조선왕릉 조성에 동원된 기간은 대략 3~5개월, 인원은 5,000명 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국가 공사였다. 예를 들면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 조성 과정에서 석장 40명이 열흘간 혼유석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동구릉 입구의 재실(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하는 곳) 앞에는 관람객들이 투호 놀이를 즐기고 있다.
동구릉 입구의 재실 앞에 마련된 투호 |
조선 왕릉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살펴 보세요.
석물의 조각이 굉장히 섬세하게 잘되었네요.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옷의 무늬가 섬세하게 표현된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답글삭제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삭제오래전에 가본곳이긴 하지만, 꼼꼼하게 알려주셔서 좋은공부가 되었습니다.
답글삭제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네요. 즐거운 주말 맞이하세요.^^
오래전부터 가야지 하면서 처음 가봤습니다.
삭제봄이 온 것 같은데 아직은 좀 쌀쌀하네요.^^
충실히 엮으신 릉에대한 설명 잘 보고갑니다.
답글삭제많은 공부가되었습니다.
다음에 능을 찾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동구릉은 공원의 기능도 하고 있더군요.
삭제기회되시면 한번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작년 겨울에 동구릉을 찾았었지요.. 어찌나 춥던지..
답글삭제초록이 가득한 동구릉을 보니 새롭습니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
좀 덥긴해도 날씨는 화창하고 좋았었는데..
삭제눈 덮힌 겨울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