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2일 목요일

남양주 순강원과 봉영사

8,2013
순강원,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위치한 인빈김씨의 묘

우연히 남양주에 있는 봉영사와 순강원의 얘기를 들었다. 받들 봉(奉)자를 사용한 걸보면 왕실과 관련된 절이다.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처럼 말이다. 현재는 세조의 릉인 광릉 관리사무소에서 순강원을 관리하고 있다. 비공개 지역으로 학술목적 등의 사유로 사전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게 광릉관리소 직원의 얘기였다. 인터넷 검색해 보면 순강원 내부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올려진 블로그 등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방문해서 촬영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학술목적으로 사전 신고하고 방문했다는 건지. 

잠겨진 대문을 지나 봉영사로 갔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아쉬움이 남아 담장 너머로 내부를 보고 한 두컷 사진으로 남겼다. 정자각, 봉분등은 보이지 않고 아마도 사진에 보이는 건물 뒤쪽 어디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순강원은 인빈김씨의 묘다.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5녀(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정숙옹주,정안옹주,정휘옹주)를 생산한다. 셋째아들인 정원군의 장자인 능양군 이종이 인조반정(쿠테타)으로 당시 국왕인 광해군(공빈김씨의 소생으로 광종이나 광조가 되었어야할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았는다.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인빈김씨는1613년(광해군 5년) 음력 10월 29일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장사지냈으며, 1755년(영조 31년), 앞서 영조가 격상한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와 격을 맞추어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증시하고, 묘(墓)도 원(園)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으로 올렸으며, 사당 역시 방(房)에서 궁(宮)으로 격상하여 저경궁(儲慶宮)으로 궁호를 올렸다. 동시, 그녀가 입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촌 언니 숙의 이씨도 경빈(慶嬪)에 추증되었다.
순강원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봉영사가 나온다. 봉영사는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천점산(천견산이라고도 부른다) 기슭에 있는 조계종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진평왕 21년)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봉인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년)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의 묘가 순강원으로 승격되면서 이 절을 인빈김씨의 원찰로 삼아 절 이름까지도 봉인암(奉仁庵)에서 “순강원을 오래도록 받든다”는 뜻으로 봉영사로 바뀌게 된다. 1877년(고종 14년) 고종의 백부인 흥인군 이최응이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으며, 이후 계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봉영사 무량수전

봉영사 지장전
봉영사 다원

순강원과 봉영사가 위치한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년 내동리의 '내(內)'자와 비 각리의 '각(閣)'자를 따서 내각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한편 내각리에는 풍양궁이 있었다 고 하여 '궐리(闕里)·대궐터·구궐지(舊闕址)' 등의 이름이 있다. 
정종은 1400년(정종2년) 11월에 왕위를 아우 정안군(후에 태종이 됨)에게 양위하고,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풍양궁터로 옮겨가게 된다. 병이 심해져서 심신을 휴양하기 위해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내용의 교서(敎書)를 내고, 정종이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곳 대궐터(풍양궁터)이다. 물론 여러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쉬기 위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휴식을 취하겠다는 것은 정종의 솔직한 본심이었을 것이다.
이후 정종의 아버지인 태조도 이 곳에 머무르게 된다. 1402년(태종 2년) 태조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 방석과 방번이 참변을 당하자 태종을 미워하며 함흥으로 가버린다. 그 곳에 머문지 4년 만에 박순(朴淳)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 는 길에 이 곳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자 내각들이 와서 모시고 갔다고 한다.
이렇게 대궐터는 태조, 정종, 태종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그렇지만 대궐터는 이름 그대로 대궐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이, 태상왕(太上王)과 상왕(上王)이 왕위를 물러나 머물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이 마을은  '비각촌' 혹은 '비각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전하고 상왕으로 있을 때 이 곳에 행궁을 정했던 곳이라서 비각(碑閣)을 세운  후로, '비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비각촌' 혹은 '비각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말'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임진왜란 때 풍양궁은 물론이고 이 곳이 모두 불타버리자, 새로이 집들이 들어서고 마을을 형성하게 된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내동(內洞)은 이성계가 비각마을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있을 때, 왕비 강씨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안마을이라는 뜻의 '내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비각(碑閣) 리'는 대궐터에 있는 비각에서 유래하였다. 비각에는 1755년(영조 31년), 1905년(광무 9년)에 세워진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이곳이 풍양궁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순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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