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묘 신도비
서울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을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덕릉고개다. 이어주는 도로명도 덕릉로이다. 덕릉로는 덕흥대원군묘에서 유래되었다.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1대 국왕인 중종과 후궁인 창빈 안씨 소생이다. 13대 국왕인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河城君 鈞)이 왕위에 오른다. 이가 바로 14대 국왕인 선조다. 덕흥군은 선조가 즉위하기 전인 1559년에 죽었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왕으로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했으며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덕흥대원군 묘역에는 아래쪽에 장자인 하원군 정(河原君 鋥)과 남양군부인 홍씨의 묘가 있고 위에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묘가 있다. 신도비는 만력(명 13대 신종의 연호)원년인 1573년 하원군의 장인인 강령군 홍섬이 찬하고 중종의 부마인 여성군 송인이 썼다.
덕흥군의 모친 창빈안씨의 묘는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위치해 있다. 1549년 창빈 안씨가 죽자 덕흥군은 경기도 양주 장흥에 묘를 마련했는데 풍수가들의 말을 듣고 1년만에 동작나루 건너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2년 뒤 1551년 하성군 균이 태어난다. 선조 이후 조선 왕들은 모두 선조의 핏줄들이고 창빈안씨 소생이다. 그래서 동작릉이라 불리며 명당이라고 한다.
관련 포스트: 국립현충원에 위치한 창빈안씨 묘역
그리고 음력 5월9일인 6월17일 덕흥대원군의 제454주기 기신제가 있는 날이라고 한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묘 |
조선시대의 능원제도(陵園制度)는 제왕과 후비(后妃)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왕세자비 및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원(園)이라 일컫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정식으로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한 가지 방법을 꾀하였다. 어느 날 동대문 밖에서 시탄상(柴炭商: 장작과 숯을 파는 장사꾼) 한 사람을 불러서 명하기를, 너는 지금부터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나무수레와 숯수레를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 왔다고 하지 않으면 그대로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여라 하였다. 이 명을 받은 시탄상은 이 후 한번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한 사람 두 사람 건너 도성 동쪽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오강(五江)의 시탄상들까지 일부러 동대문 쪽으로 찾아와서 덕릉을 지나 왔노라고 하였다. 그 후 시탄상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은 중단되었으나 이후부터 저절로 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출처: 서울의 역사와 문화 유산 자료
묘역에 피어 있는 붓꽃(아이리스) |
흥국사는 대방 건물이 유명한데 복원 공사중이고 대웅보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웅보전 옆에 위치한 영산전 사진과 다른 건물 사진 몇 장만 담아 왔다.
수락산 흥국사 영산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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