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서계종택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인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예전의 양주군 석천동)에는 서계종택(반남박씨 서계공파 종택)과 서계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서계의 부친인 박정이 인조반정의 공신 책록으로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다. 종택 정문에 개조심이란 문구가 뜽금없다 싶은데 옆으로 돌아가면 개집에 백구가 한 마리 있다. 진돗개로 보여지는데 처음에 사납게 짖더니 조금 지나니 조용해진다.서계고택은 서계의 5세손이 지은 건물로 사랑채만 남고 다른 건물들은 한국전쟁에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종택에서 인상적인 것은 마당에 심어진 은행나무. 수령 400년이 넘은 이 나무는 의정부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건물은 좌향이 서쪽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남향이 일반적인데 아마도 사랑채 정면으로 보이는 도봉산의 주봉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택 뒤로 올라가면 종중의 묘택들이 보이고 좀 더 올라가면 서계묘역도 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 곳곳이 물고랑이 깊게 패여있었다. 다행히 묘역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서계종택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주중에 일반인 관람이 가능하다. 문화해설사들이 고택에 대한 자세한 설명해 주는 모양이다.
참고: 서계문화재단
서계(西溪) 박세당은 인조 7년(1629) 반남박씨 박정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현종,숙종대의 유학자이자 중농주의 실학자로 실제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색경으로 유명하다. 서계선생의 대표적인 저술인 '사변록'의 원래 명칭은 통설(通說)이었다. 대학, 논어,중용, 맹자, 상서, 시경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데, 특히 대학과 중용에 대한 견해가 독창성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하지만 후일 이 책으로 인해 당대 주류였던 노론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려 유배되고 후학 이인엽의 상소로 해배되어 돌아온지 3개월만에 숨진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유교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여 일컫는 말로 조선 후기,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노론(老論)이 정적인 남인(南人)·소론(少論)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명분으로 쓰였다. 서계는 이경석, 박세채, 남구만 등과 함께 소론이었다.
하지만 박세당이 죽음에 이른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한다. 백헌(白軒) 이경석 신도비문과 관련이 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17년(1639) 청 태종의 요구로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가 세워진다. 백헌이 삼전도비문을 썼다. 이후 우암 송시열은 비록 청의 요구로 비문을 쓰게 되지만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데 신경쓰며 비문을 쓴 것이라고 백헌을 공격했다. 당시 백헌은 송시열의 이런 비난에 직접 대응 하지 않았다. 숙종 29년(1702) 백헌 사망후 그의 비문을 박세당이 쓰게 된다. 비문에서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 송시열을 상서롭지 못한 인간(不祥人:불상인)으로 비유했다. 또한 이경석을 군자의 상징인 '봉황'으로 송시열을 그 봉황을 모욕하는 '올빼미'로 풍자하기도 했다. 이에 노론은 발끈했다. 영수인 송시열을 모욕했다고 생각한 노론 일파들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참고: 백헌 이경석
이런 역사적인 내용을 알고 보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리고 수락산에는 오세신동으로 알려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매월당은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전국을 떠돌게 된다. 처음으로 은거한 곳이 수락산 동봉이었다. 매월당의 다른 호에 동봉(東峰)이 있다. 박세당은 자신의 호를 서계(西溪)라고 했다.
참고: 매월당 김시습
청풍정유지 |
서계는 집 주변의 샘을 석천(石泉)이라 하고 동네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부르고 바위에 石泉洞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외에도 서계가 즐겨 찾았다는 취승대(聚勝臺)와 처남인 남구만이 쓴 수락동천(水落洞天), 넓은 바위에 새긴 서계유거(西溪幽居)와 같은 암각서들이 남아 있다. 또한 서계가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궤산정이 근래에 보수되어 남아있다.
청풍정 유지 맞은편에 노강서원이 나타난다. 노강서원은 서계의 둘째아들인 정재(定齋) 박태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재 박태보는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순절하였다. 노강서원터가 옛 청절사가 있던 곳이다.
노강서원 |
노강서원을 지나 10여분 산길을 오르면 석림사가 나온다. 범종각이 먼저 시야에 들어오고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보인다. 현판은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씌여져 있다.
수락산 석림사 |
아주 멋진곳을 소개해주셨군요.
답글삭제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저렇게 푸르른 하늘을 언제나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답글삭제요즘은 날씨때문에 많이 힘이 드는군요...
오늘도 아름다운 곳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저런 역사적인 유적은 정부가 돈을 들여 잘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어제 저녁 미국에 있는 서재필 박사 기념관은 관리가 안되여 집은 헐고, 유물 전시는 잘 되어있지 않고 먼지만 쌓였다고 하던데 ..
답글삭제@skypark
답글삭제또 비가 오네요. 건강하게 잘 보내세요^.^
@뽀키
파란 하늘 보기가 쉽지 않네요. 잘 지내세요^.^
@mark
대문 문패에 경기도에서 인증한 종가라고 붙어있던데 어떻게 지원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잘 봤습니다.
답글삭제전 지금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직접 발로 가서 본 곳은 머릿속에 오래 남더라고요.
@잉여토기
답글삭제그래서 답사가 필요한게 아닐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