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0일 토요일

봉은사 판전

봉은사 판전

image via 내가 꿈꾸는 그곳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


야경 촬영하러 많이들 들르는 곳인데, 봉은사 경내의 여러 명소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전각은 바로 판전이다. 이곳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은사에는 왜 판전이 건립되었던 것인가. 판전 밖에 서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봉은사 중창주 문정왕후의 죽음, 보우대사의 유배와 순교를 끝으로 조선 명종대의 불교부흥운동은 중단되었고, 봉은사의 역사도 조선불교의 침체와 함께 오랜 부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보우스님 이후에도 사명스님, 벽암 각성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봉은사와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대에 비해 크게 뒤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봉은사는 당우가 크게 불타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침체기를 보내고 있던 봉은사에 분위기를 일신하는 대작불사가 바로 판각작업이었다. 조선말기 철종 6년(1855) 남호 영기스님이 <화엄경소> 판각을 발원하여 판전을 건립하고, 이듬해 화엄경 81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료들을 판각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봉은사의 유래는 봉원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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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1. 저도 야경촬영하러 딱 한번 들려보았던곳인데,

    글을 읽고보니, 제대로 둘러보지못한것이 너무 아쉽군요.

    기회가되면 밝은날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봉은사 문제가 뉴스에 종종 나오던데,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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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kypark - 2010/04/12 12:09
    판전 이외에도 이것 저것 볼게 있는 사찰입니다..

    제대로 잘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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