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판전
image via 내가 꿈꾸는 그곳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
야경 촬영하러 많이들 들르는 곳인데, 봉은사 경내의 여러 명소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전각은 바로 판전이다. 이곳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은사에는 왜 판전이 건립되었던 것인가. 판전 밖에 서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봉은사 중창주 문정왕후의 죽음, 보우대사의 유배와 순교를 끝으로 조선 명종대의 불교부흥운동은 중단되었고, 봉은사의 역사도 조선불교의 침체와 함께 오랜 부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보우스님 이후에도 사명스님, 벽암 각성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봉은사와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대에 비해 크게 뒤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봉은사는 당우가 크게 불타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침체기를 보내고 있던 봉은사에 분위기를 일신하는 대작불사가 바로 판각작업이었다. 조선말기 철종 6년(1855) 남호 영기스님이 <화엄경소> 판각을 발원하여 판전을 건립하고, 이듬해 화엄경 81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료들을 판각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봉은사의 유래는 봉원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해왔다.
펼쳐두기..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며 보현행을 닦았던 신라 원성왕대의 고승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38 <잡지(雜誌)> 제7에는 봉은사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실려 있다. 이른바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곱 사찰은 사천왕사ㆍ봉선사ㆍ감은사ㆍ봉덕사ㆍ영모사ㆍ영흥사 그리고 봉은사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하는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였다.
조선시대에 불교 사원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에 따라 1406년(태종 6)에는 국가 인정 사찰이 242개사로 줄었고, 1424년(세종 6)에는 다시 전국의 사찰 중에서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각 18개 사찰씩 36사만을 선정하여 3천 7백여 명의 승려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선교 양종 제도 시행시에 서울의 중심 사찰은 선종사원 흥천사와 교종사원 흥덕사였다. 이밖에 인근에 승가사와 장의사가 36사에 들어 인정받았지만 봉은사나 그 전신인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연산군 대에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고 선교 양종 제도도 무너졌다.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은 명종대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활동에서부터이다. 이미 중종 때부터 봉은사는 중심 사찰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도성에서 선교 양종 도회소 역할을 하던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었으니 도성 인근에서 규모와 위상이 큰 사찰로는 봉은사가 대신 부상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중종 때인 1539년(중종 34)에 대대적으로 사찰을 모두 철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그 중심에 봉은사가 있으니, 이들을 그냥 두고서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으로는 승려를 근절시킬 수 없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일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봉은사도 이 때 보우스님의 활동에 힘입어 수사찰의 지위를 확고이 하게 한다.
문정황후는 1550년(명종 5)에 선교 양종을 부활하여 봉은사를 그 본산으로 하도록 하고, 연산군대 이후 실시하지 않다가 1507년(중종 2년)에 완전히 폐지했던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僧科)를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선교 양종의 부활에 따라 양종 체제가 다시 기능을 되찾으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어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이 전국 으뜸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1551년(명종 6)에 특명으로 보우스님을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로 삼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奉先寺住持)에 임명된 수진(守眞)스님과 더불어 명실 공히 선교 양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정식 직함에 따라 보우스님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다.
이듬해인 1552년에는 승과가 실시되어 선종에서 400인의 예비합격자를 낸 끝에 최종적으로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고 도첩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선종 수사찰 봉은사에서는 보우스님이 주도하는 선종 승과가 시행되어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평(僧科坪)이 되었다. 비록 규정대로 양종 각 30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지는 못했으나 휴정을 비롯한 승과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명분을 얻어 활발하게 역량을 펼칠 인재들을 배출해낸 것이었다. 이는 보우스님의 활동 터전이었던 봉은사가 당시 불교계 운영의 중심에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1555년(명종 10)에 개최된 두 번째 승과를 주관하고 나서 보우스님은 봉은사 주지직과 선종판사를 그만 두고 청평사로 은퇴하였다. 보우스님은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심회를 시로 풀어냈는데, 수많은 시비 가운데 팔년 동안 한강변에 선교를 일으켰다는, 곧 봉은사에 선교 양종 체제를 재건하고 중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자부하며 때가 되면 오고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자신의 선의 이치이니 공연히 다른 생각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신료들의 빗발치는 반대 속에서 과감하게 추진했던 불교 재건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 대신 1552년에 승과에 급제했던 서산대사 휴정이 1555년 여름에 교종판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선종판사가 되어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1557년에 휴정은 봉은사 주지를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다.
보우스님은 1560년(명종 15)에 5년 동안의 청평사 은거를 마치고 다시 봉은사 주지직을 맡았다. 그리고 1562년에 주선하여 시행한 승과에서는 사명대사 유정이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해 1562년 7월 보우스님는 도대선사 직위를 박탈당했다가 12월에 다시 직첩을 받는다.
1562년(명종 17)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었다. 중종은 처음에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묻힌 희릉(禧陵)에 나란히 묻혔었다. 그런데 문정대비는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면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 싶은 생각에서 중종의 능을 봉은사 터로 옮기도록 하여 정릉이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천릉에 따라 봉은사는 수도산의 지금의 위치에 대규모로 확장 이건되었다. 왕릉 관련기록에서는 조정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당우와 요사를 창건하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져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가람의 전모는 삼존을 봉안한 대웅보전, 진여문, 식당, 12 위패를 봉안하던 어선루(御宣樓, 위패가 궁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금속루金粟樓로 바꿔 부름), 천왕문, 해탈문, 명부전, 응향각(향로전), 나한전, 뒤에 1618년에 조성한 유초관(鍮哨罐)이 있던 심검당(승당), 운하당(선당), 강선전, 서산이 매화를 심었다는 매화당, 청심당, 수륙재 공양소인 향적전, 동별당 서행랑, 대남루, 병이 든 승려들의 입적소였던 열반당 등으로 이루어졌다.
1565년 (명종 20)에 문정왕후가 갑자기 돌아갔다. 그동안 회암사를 중창하고 무차대회를 진행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던 보우스님은 문정황후의 승하에 이어 탄핵을 받아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제주목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선교 양종과 승과가 차례로 폐지되었다. 보우스님과 문정황후의 노력으로 부활했던 조선 불교가 다시 조락의 시절로 접어든 것이다.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보우스님은 장차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배출하여 그 기반을 다진 중요한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보우스님의 활동과 함께 조선불교의 중심으로 부상하여 성세를 보였던 봉은사의 형세와 위상 또한 침체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절은 1939년 대화재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2차례 대부분의 전각을 소실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는데,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근 40여년이 걸렸다.
저도 야경촬영하러 딱 한번 들려보았던곳인데,
답글삭제글을 읽고보니, 제대로 둘러보지못한것이 너무 아쉽군요.
기회가되면 밝은날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봉은사 문제가 뉴스에 종종 나오던데,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skypark - 2010/04/12 12:09
답글삭제판전 이외에도 이것 저것 볼게 있는 사찰입니다..
제대로 잘 해결되었으면 합니다..